[김인현 교수 이코노미조선 기고] 어느 뱃길을 택할지, 선장의 고유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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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뱃길을 택할지, 선장의 고유 권한이다
김인현 명예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부산이나 목포로 갈 때 우리가 택하는 길은 단순하다. 기차를 타고 가거나 아니면 자가용 차를 이용한다. 그런데 그 기차나 자가용이 다니는 길은 이미 정해져있다. 기차는 철로 위를 달리고 자가용은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국가에서 이미 만들어 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바다는 어떨까? 바다는 넓고 넓다. 어느 길을 지정할 수 있을까? 항구내나 항구근처에서 안전을 위해서 미리 항로를 정해두는 경우는 있어도 대양항해의 경우는 지정한 길은 없고 단지 추천항로만 있다. 수백년 동안 뱃길이 열려왔기 때문에 “어느 항로가 좋습니다”하고 추천되는 항로는 있다는 취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쪽으로 갈 때는 길이 거의 정해져있다. 대만해협이나 대만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바시해협을 지나서 싱가폴로 가서 말라카해협을 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도양을 거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서 지중해, 그리고 유럽으로 간다. 전쟁으로 항로가 막히게 되면 필리핀 동부를 지나서 인도네시아의 롬복해협을 지나서 인도양으로 나간다.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남아공의 남단을 지난다.
이런 선택은 누가하는가? 그야말로 선장의 권한이고 의무이다. 선장은 출항에 앞서서 자신이 항해해야할 해역을 유심히 살펴보고 위험물이 있는지 태풍을 만날 가능성은 있는지 등을 본 다음 출항하기전 항로를 선정한다. 적도를 피할 수 있는지도 큰 요소이다. 더운 지방을 항해하면 컨테이너 박스 안에 온도가 올라가서 폭발사고가 날 염려가 있다.
출항을 앞둔 선장 앞에는 (i) 항해거리와 (ii) 날씨라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놓여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 LA를 가게 될 때 항정선 항법으로 갈 것인지 대권 항법으로 갈 것인지 고민한다. 대권(大圈 Great Circle)으로 가면 3일이 단축된다. 저기압이 일본의 남쪽에서 발생해서 알라스카 쪽으로 간다. 연속해서 발생하는 저기압들의 바람을 뒤에서 받으면서 항해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반대로 LA에서 한국으로 올 때에는 반대가 된다. 앞바람을 받으므로 고생고생을 한다. 짧은 길을 택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항해거리가 긴 항정선 항법을 쉽게 택할 수도 없다. 대권 항법을 좋아하던 필자도 알라스카 근처에서 큰 파도를 연속해서 받으면서 사지를 경험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안전성과 경제성도 항로 선장에 큰 고려요소가 된다. 최근 부각되는 북극항로에 적용될 수있다. 우선 1년에 1000척정도가 다니므로 하루에 3척이 다닐 정도로 미지의 항해구간인 점도 우려요소이다. 아직은 4000TEU선박만 다닐 수 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12000TEU에 비하여 운임이 비싸진다. 같은 비용에 3배나 많은 화물을 실은 선박은 운임이 1/3이 될 수 있다. 회사로서는 아직은 북극항로를 택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는 벌크선박이 주된 대상이다.
그런데, 선박을 빌려준 경우에 선장이 항로 선정권을 가지는지 아니면 용선자가 가지는지 문제가 된 큰 사건이 있었다. Hill Harmony라는 선박을 어떤 회사가 빌려갔다. 선장에게 대권항해로 가라고 지시를 했다. 선장은 대권항해에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항정선 항법으로 결정해서 항해했다. 오히려 여러 날이 더걸렸다. 대권항해에 비해 더 길어진 항해에 따른 비용을 청구하는 소송을 선장의 사용자인 선박소유자에게 제기했다. 항로 선정은 선장의 고유권한이라는 주장을 선박소유자는 했다. 그러나, 영국의 대법원은 2000.12.7.이것은 영업에 관계되므로 정기용선자가 권한을 가진다고 결정했다.
수백년동안 항로를 개척해온 선장의 항로선정권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진 판결이었다. 항로선정권만은 선장의 고유의 판단권한으로 남아있어야한다. 이 영국판결은 우리나라에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구체적인 항해의 권한은 여전히 선장이 가진다.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결정, 태풍을 피하기 위한 변침 등은 모두 선장의 고유권한임을 강조하고자한다. 수백년 동안 선장들의 목숨과 바꾼 항로는 오롯이 선장들의 몫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북극항로의 개척도 수백년의 바다의 전통에 따라 선장들이 앞장서고 그들을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